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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육연원민
작성일 26-09-0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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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인데 한국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믿겠는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i, 1880~1953)가 바로 그 사람이다. 2004년 한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을 주었는데, 일본인으로는 최초였다. 죽은 지 반세기가 넘어 받은 훈장이니 당사자는 알 길이 없지만, 역사는 가끔 이렇게 뒤늦게라도 셈을 치른다.
후세 다쓰지(나무위키)
검사를 그만두고 민중의 변호사로
후세는 일본 미야기현의 농촌에서 태어나 도쿄로 올라가 법률을 공부하고 스물두 살에 판검사 시험에 붙었다. 우쓰노미야에서 검사보로 일했지만 여섯 달 만에 사표를 던졌다. 자식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어머니를 기소하는 검찰의 태도가 늑대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변호사가 되어 농민, 여성, 성노동자, 소수민족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한 해에 2백 건이 넘는 사건을 맡을 정도로 바빴고, 상당수는 무료변론이었다.
1920년 그는 "자기혁명의 고백"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전통적인 변호사"에서 "민중의 변호사"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편안하고 풍족한 변호사의 삶을 버리고 보통 사람들 곁에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말로만 그친 게 아니라 평생 그렇게 살았다.
한복 차림의 후세 다쓰지 ⓒ 오이시 스스무(후세의 외손자)
관동대학살, 가해국 국민이 흘린 눈물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수천 명의 조선인이 자경단과 군경에게 학살당했다. 후세는 이 학살에 항의하며 진상조사를 요구했고, 그해 겨울 추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서운 비극이다. 조선동포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애도할 말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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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사죄의 편지를 보냈고, 훗날에는 학살의 진상을 다룬 책까지 썼다. 가해국의 국민이 피해자에게 먼저 고개를 숙인 흔치 않은 사례다.
관동대학살 당시 조선인 학살 장면(위키피디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우정으로 남다
후세의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은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1902~1974)과 그의 일본인 동지 가네코 후미코(1903~1926)의 대역죄 재판이다. 두 사람이 옥중결혼을 원하자 후세가 직접 주례를 섰다. 가네코가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자 후세는 그 유해를 수습해 조선으로 보냈다. 훗날 그는 박열의 전기를 썼고, 이 이야기는 2017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흔히 그를 "일본의 쉰들러"라 부르는데, 유대인을 구한 오스카 쉰들러(1908~1974)에 빗댄 표현이다.
박열(위키피디아)
가네코 후미코(위키피디아)
감옥과 침묵, 그리고 다시 법정으로
후세의 활동은 당연히 일본당국의 눈엣가시였다. 여러 차례 체포되었고 1933년에는 출판 관련 법 위반으로 석 달간 옥살이를 했다. 1939년에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유죄를 받아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그의 셋째 아들 모리오는 같은 법으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숨졌다. 그럼에도 후세는 일본이 패망한 1945년 이후 다시 변호사로 돌아와 재일조선인을 위한 변론을 이어갔고, 195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일을 놓지 않았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선인이 찾아와 그를 배웅했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전해진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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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 후세 다쓰지(위키피디아)
오늘 한국에 던지는 질문
후세를 되짚어보는 이유는 단순히 착한 일본인을 칭송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자기 나라 국가권력과 정면으로 맞선 법률가였다. 자국의 이익이나 명분보다 눈앞의 부당함을 먼저 본 사람이었다. 지금 한국에서 되새길 대목이 바로 여기 있다.
2024년 12월 3일 밤, 이 나라는 계엄이라는 낯선 단어를 다시 마주했다. 그날 이후 누가 헌법 편에 섰고 누가 권력 편에 섰는지가 갈렸다. 법률가라는 직함은 같아도 그 직함을 누구를 위해 쓰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후세처럼 자기 소속과 이해관계를 넘어 원칙을 지킨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권력의 논리를 정교하게 포장해준 이들도 있었다. 역사는 이 둘을 결코 같은 줄에 세우지 않는다.
후세가 조선인을 변호한 것은 그것이 손해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 값지다. 지금 한국에서도 손해를 감수하고 원칙을 지키는 이들이 필요하다. 검찰이든 판사든, 혹은 평범한 시민이든 말이다. 후세는 죽은 지 51년 만에 훈장을 받았다. 그를 향한 평가는 당대가 아니라 반세기 뒤에야 제대로 내려졌다. 지금 한국에서 윤석열의 계엄에 동조한 이들과 맞선 이들이 뒤섞여 보이는 것도 같은 이치다. 오늘의 이해관계로는 잘 구분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누가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켰고 누가 권력에 맹목적으로 아부했는지는 결국 분명하게 갈라진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후세 다쓰지(오른쪽)가 생전에 변호를 맡았던 박열(왼쪽). 가운데 서 있는 이는 아나키스트 동지였던 박상중 ⓒ 오이시 스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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