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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육연원민
작성일 26-08-22 02:48 | 조회 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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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독립투쟁과 의회정치의 선구자, 윤기섭 1887년 4월 4일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파주리(현 파주시 파주읍) 마산동에서 출생한 윤기섭은 일찍이 만주와 중국 관내를 넘나들며 민족운동의 선두에서 독립전쟁을 주창했다. 1909년 서울 보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정주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해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국권피탈 이후 서간도 삼원포로 망명, 경학사·부민단 등 조직에 참여하는 한편 10여년 동안 신흥무관학교의 학감 및 교관으로서 많은 군사인재들을 배출하였다. '눈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 아침마다 윤기섭 교감이 초모자를 쓰고 홑옷을 입고 나와 .검하고 체조를 시키면서도 그 활기찬 목소리에 늠름한 기상과 뜨거운 정성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라는 졸업생의 회고는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양성한 군사인재들은 이후 청산리전투를 비롯하여 만주지역의 무장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20년 2월 한족회와 서로군정서에서는 임시의정원의 서간도 대표로 윤기섭과 이진산을 선출하여 상하이에 파견했다. 그들은 안창호를 방문하여 서간도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고, 임시의정원에 나가 '군사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건의서에는 임시정부 군사기관을 만주와 연해주로 옮기고 보병 10개 내지 20개 연대를 편성 훈련하여 금년 내에 혈전(血戰)을 개시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모바일 우주전함 야마토 게임 . 1920년 4월 말에는 간도시찰원으로 선정돼 서북간도 지역의 독립군 현황을 조사하고, 청산리전투와 뒤이은 경신참변을 목격한 후 상하이로 귀환했다. 이후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국민대표회의가 무산되자 1922년 10월 장기적인 대일투쟁을 위한 '한국노병회'의 창설에 참여했다. 이때 한국노병회의 교육부장 등을 역임하면서「보병조전(步兵操典)」이라는 이론과 실무를 겸한 군사교육지침서를 발간하였다. 또한 상하이 지역 한인교육기관인 '인성학교' 학감으로 초청돼 한국사와 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한편 윤기섭은 임시의정원에도 적극 참여, 1923년 4월에는 임시의정원 제7대 의장에 선출돼 1년 동안 임시의정원을 이끌었다. 윤기섭은 의정원 내에서 누구보다 활발한 의정활동을 벌였다. 당시 '임시의정원 회의록'에 의하면 늘 적극적이고 서슴없이 발언하였으며, 남들이 소소하게 생각하는 숫자 하나도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독립운동 전선에서 유일당운동이 일어나자 윤기섭은 상하이촉성회의 집행위원으로 서출됐다. 이후 한국혁명당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정당 활동과 별도로 임시정부와의 관계도 유지하면서 1933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온라인손오공릴게임 그의 한국혁명당은 홍진의 재만한국독립당과 제휴하여 신한독립당을 결성했고, 각 세력의 통합 논의를 거쳐 1935년 난징에서 대통합 정당인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윤기섭은 중앙집행위원장, 훈련부 부장 등 주로 군사훈련 방면에서 중국 측과 연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7년 11월 난징이 일본군에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당원들과 그 가족들을 인솔해 난징을 탈출하고 우한을 경유하여 1938년 3월 충칭에 도착했다. 1941년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참여를 당론으로 결정했고, 윤기섭은 1942년 8월 외무부 외교연구위원, 1943년 군무부 차장에 취임했다. 이때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의 철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 6월 임시정부 생활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돼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들의 생활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관장했다. 윤기섭은 광복 이후 교민들의 귀국을 진두지휘하면서 1946년 4월 말 약 300명의 대가족을 인솔해 무사히 귀국하게 된다. 환국 후에는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남조선 과도입법위원의 부의장과 민족자주연맹 등에서 활동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으로 옥중 당선됐으나 6.25 전쟁 때 납북돼 1959년 2월 27일 73세로 북한에서 서거했다. 1989년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윤기섭은 평생을 무장독립투쟁과 의회정치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로서, 흔들리지 않는 꼿꼿한 지사로서의 지조를 지킨 독립운동계의 큰 지도자였다. 김병기 전 광복회 학술원장 ground: 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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